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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지역을 빛낸 12인의 신앙인 : 이현속 전도사(1900. 12. 21.~1945. 5. 23.) 이야기1/신앙의 발자취

by 리빙스톤 2022.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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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속 전도사는 함안국 신일면 부봉리에서 부 이수목, 모 하구류의 1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본래 이름은 '쾌한'이었으나 장성한 후에 '현속'으로 개명하였다. 아버지 이수목은 술과 담배를 즐기던 사람이었으나 그로 인해 간을 상하여 고통을 당하던 중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주변의 권고로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산인교회에 출석하였으며 어린 현속도 자연스럽게 교회에 출석하여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수목은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후 복음을 깨달아 진정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1906년 부봉교회가 세워질 때 자신의 토지를 헌납하여 교회가 세워지게 하였다. 이현속은 1911년 8월 12일 세례를 받았다고, 당시의 조혼 풍습에 따라 15세에 흥선이와의 혼인을 하였다. 1921년 4월 19일 26세의 젊은 나이에 부봉교회의 영수가 되었으며 1925년 1월 18일 부봉교회에서 장로가 되었는데 장로가 된 후 교회지도자로서 성경에 무지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해 진주성경학교 별과에 입학하여 1년 후인 1927년 졸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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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속은 성경학교를 졸업하면서 부봉교회를 떠나 영산교회에서 전도사로 1년을 봉직하고 1928년 4월에 진주 문산교회로 부임해 2년, 1930년 하동읍 교회로 이동하였다. 당시 하동읍교회는 교회로서는 안정되었으나 전도사의 사례를 단독으로 감당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여 끼니를 위해 미숫가루를 양식으로 삼았고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많았지만, 그 가운데 이 전도사는 화계, 악양, 적양, 북천 등 주변 7교회를 맡아 순회하며 예배를 인도하였다.

 

  1932년 산청군 덕산면의 덕산교회에 부임하고 1934년 그의 나이 35세에 평양신학교에 입학 공부하던 중 1938년 덕산교회를 떠나 생초교회를 개척했다. 1938년 9월 신사참배를 결의함으로 신학교가 폐교되었고 그는 신사참배 결의에 슬퍼하며 며칠을 울었다고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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