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에서 미곡상을 하던 부 송국필과 모 손일남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나 7세 때 부친을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마산공립보통학교를 거쳐 마산간이농업학교를 마치고 서울 보성학교 법과에 입학하였으나 가정형편으로 2학년 중퇴를 하였다. 마산으로 돌아와 양산 통도사에서 불교에 심취하기도 하였으며, 그 후 일제경찰에 투신하여 수년을 근무하였ㄸ. 23세 경 통영군 욕지도의 사립 원량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던 중 욕지교회 강사영 영수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복음을 받은 후 주를 온전히 섬겨 추도에서 열심히 전도하여 추도교회를 부흥시켰으며, 통영 진명학교로 옮긴 후 부산의 양성봉, 마산의 이영한 등과 함께 기독교 청년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일제경찰의 경력으로 인하여 통영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황해도 황주의 이동희를 찾아가 황주의 양성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 후 본격적인 사회운동을 할 뜻을 가지고 서울 종로 중앙교회 김창준 목사(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를 찾아 그 교회의 권사로 봉직하면서 김창준 목사의 후원으로 절제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중앙교회 교인이던 조병옥, 류형기 등과 교분을 맺게 되었으며, 이들과 함께 사회운동을 하던 중 분명한 신분을 갖추기 위하여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34년(29회) 졸업하였다.
송 목사는 평양신학교 재학 중 이미 절제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곽안련 선교사, 정인과 목사 등으로부터 지지를 받아 주일학교 공과에 절제과목을 넣도록 하고 교재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또 1932년 5월 조만식과 채필근을 회장으로 한 '조선기독교절제운동회'를 조직하고 총무로 취임하여 활동하였다. 신학교를 졸업하던 1934년 장로교, 감리교 양 교파는 선교 5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를 기회로 전국적인 절제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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